2026.05.23 series:작가의 도구

책상 위 — 10년째 안 바뀐 물건 5가지

책상 위에 10년째 그 자리에 있는 물건들이 있다. 정확히 다섯 개. 다른 물건은 들어왔다 나갔지만, 이 다섯 가지만 바뀌지 않았다. 이것들이 작가로서의 나를 정의한다.

의자에 대해 썼던 그 시리즈의 연장이다. 의자가 작가의 몸의 일부라면, 책상 위 물건들은 작가의 도구의 일부다.

미니멀 책상 위

1. 만년필 — 라미 사파리, 검정

2014년 12월 25일에 받은 선물이다. 4만원짜리. 잉크 카트리지가 닳을 때마다 새로 끼우면서 11년째 같은 펜이다. 잉크 색은 항상 검정. 다른 색은 시도해봤지만 결국 돌아왔다.

좋은 만년필은 손에 익는 것이지, 비싸야 하는 게 아니다. 4만원짜리가 40만원짜리보다 좋아질 수 있다. 그저 11년 동안 같이 있어주면 된다.

2. 노트 — 몰스킨, A5 라이드

매년 1월 1일에 새 노트를 산다. 같은 사이즈, 같은 라인, 같은 색 (검정). 한 권당 3만원. 비싸 보이지만 1년에 3만원이면 매일 80원이다.

다른 노트도 시도해봤다. 로이텀1917, 미도리, 한국 토종 브랜드. 모두 좋았다. 그런데 손이 결국 몰스킨으로 돌아갔다. 익숙함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3. 키보드 — HHKB Professional 2

2016년 구입. 지금 30만원이 넘지만 그땐 20만원. 7년 사용 후 한 번 청소하고, 한 번도 안 바꿨다. 키캡 한 개도 똑같다. 키 하나하나가 손가락의 기억이 됐다.

새 키보드를 사면 일주일은 어색하다. 그러나 일주일 후엔 적응한다. 그래서 새것을 안 사는 게 아니라, 이걸 떠나는 게 아쉬워서 안 산다.

4. 머그컵 — 흰색 무지, 손잡이 두꺼움

2015년 IKEA에서 5천원에 산 흰 머그컵. 다른 컵보다 손잡이가 두꺼워서 따뜻한 차를 오래 쥐고 있을 수 있다. 작가에게 머그컵은 글의 페이스 메이커다.

한 번 떨어뜨려서 깨질 뻔했다. 손잡이가 살짝 금이 갔다. 그 금을 보고 더 정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은 도구에 정이 더 든다.

5. 액자 — 작은 흑백 사진 한 장

이건 비밀이다. 누구의 사진인지는 안 적는다. 다만 책상 왼쪽 위에 항상 있다. 글이 막힐 때 그 사진을 본다. 글이 잘 써질 때도 그 사진을 본다.

작가에게 책상 위에는 한 장의 사진이 필요하다. 그게 누구든.

도구는 정체성이다. 10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결국 그 사람을 만든다.

이어서

이 시리즈의 다음 편은 밖으로 나간다. 책상이 아니라 그 밖의 도구들 — 가방, 신발, 외출의 의식. 이건 다음 새벽에 써야 할 것 같다.

FOOTNOTE — 안 적은 한 가지

책상 위에 사실 6번째 물건이 있다. 그러나 그건 매번 바뀌어서 적지 않았다. 책. 매주 다른 책이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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